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서로 다른 죽음을 접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며칠전 부고를 통해 알게 된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YouTube에서 보았습니다. 자막이 없어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죽음이 몇달 남지 않았음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낙망하지 않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알차게 보내려고 하는 절박함이 느껴졌습니다. 특히나 마지막에 강의의 대상이 청중이 아니라 아직은 어린 그의 아이들이라고 밝힐때는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사람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가슴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아침 출근길에는 매일 지나가는 시장 골목 한 구석에 하얀 천을 덮고 있는 시체를 보았습니다. 천 사이로 보이는 시체의 모습과 주변에 모여있는 경찰, 동네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추정하건데 모텔에서 투신을 한것 같았습니다. 자살을 시사하는 주변의 모습이나 시체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적을 수도 있겠지만 글을 읽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필요도 없고 또 사실이 틀렸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때 저의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시체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병원과 같이 죽음이 일상적인 곳에서 마음의 대비를 한 상태가 아니라 놀라기도 하고 영화속과 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실 정리보다는 망각이 더 큰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만) 글을 쓴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것도 정리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죽음이 정해진 상태에서 조금이나마 이를 뒤로 미루려고 노력했지만 죽음을 맞이했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서 아직 남아 있는 그의 생을 정리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현실적으로나 믿음적으로나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지구"란 다큐멘터리를 볼 때 거대한 호수에서 엄청나게 많은 새떼가 날아가는 것을 아주 멀리서 줌 렌즈로 잡아 점차 줌 아웃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처음 열심히 날개짓을 하며 날아가던 몇마리의 새가 수만, 수십만 마리의 새떼 속에 속해있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의 일생이란 생명이란 거대한 무리속에 속하는 미세한 존재지만 거대한 무리속의 각 존재에게는 그 자신만의 절박한 삶과 사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체로 보면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각각에게는 자신의 삶이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기회이고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각 개체는 너무 작습니다.

누군가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멀리서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채 피어나기도 전 어린 나이, 한창 인생을 살아가고 가정을 키워나갈 때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죽음은 우연에 가깝게 어느 순간 우리를 찾아옵니다. 찾아오는 죽음의 시기를 조절하기 위해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좀 더 열심히 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고 주변을 좀 더 위해주는 것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요.

두분 모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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