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숙소에 비해서는 값도 비쌌지만 훨씬 안락했던 숙소탓인지 해가 뜨기전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빛이 좋을 무렵 모뉴먼트 밸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어제 지났던 도로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모뉴먼트 밸리 내부는 나바호족에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지만 도로에서 대충의 풍경을 볼 수 있으므로 굳이 시간을 들여 내부를 둘러보지 않고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습니다.

모뉴먼트 밸리.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몇년째 달리기로 미국 종단을 하던 포레스트가 이제 달리기를 그만두어야 되겠다고 추종자들에게 말하는 곳이고 자전거로 7년 반동안 세계 일주를 한 일본의 여행가가 세계 최고의 자연 풍경으로 꼽은 곳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암석 고원이 오랜 시간동안 비와 바람에 의해 깎여져 나가고 남은 잔해. 존 포드 감독이 만든 서부영화의 배경으로 흔히 등장한다는 네모난 암석을 보고 있으니 왜 이곳을 배경으로 했을지 궁금해 집니다. 배경으로 삼기에 소위 그림이 잘 나와서였겠지만 원주민들의 쇠락을 상징하는 곳으로 그들의 땅에서 영화를 찍지는 않았을까란 생각도 해 봅니다. 이곳의 땅은 작은 관목들만 조금씩 있을 뿐 황무지에 가깝습니다. 이곳에서 그랜드 캐년의 동쪽 입구까지는 나바호족의 자치구역인데 많은 사람들이 기념품을 만들어 길가의 작은 판자집에서 팔고 있었고 다른 종류의 일거리는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한때는 거대한 대지에서 자연과 함께 살던 사람들은 잊혀지고 없어졌으며 그들의 후손은 조상들을 몰아낸 자들의 생활 양식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관광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상의 방식대로 살지도 못하고 사회의 주류로 올라가기도 힘든 많은 원주민들이 술과 마약에 중독된다는 어디선가의 뉴스가 떠오릅니다. 아메리카 대륙이 지금까지 그들의 땅으로 남아있었다면 원주민들은 그들의 생활 방식을 지금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결국 외부인들의 생활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거나 외부인의 물건에 탐욕스런 자들에 의해 붕괴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 봅니다. 현대 생활의 부작용이 자꾸만 드러나는 요즘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순응하면서 살아갔던 그들의 방식이 현명하고 올바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의 생활이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나 사회가 외부 사회에 의해 순박함을 잃어버리기 쉽고 한번 잃어버린 순수함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일겁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미국 종단 달리기를 멈추는 도로


서부 영화의 배경으로 많이 나왔던 곳


원주민 후손들의 생활. 저런곳에서 만든 물건들을 판다.



다시 카옌타로 돌아오는데 강한 모래 바람에 눈앞은 뿌옇고 뿌리채 뽑힌 관목이 길을 가로질러 굴러가는 것이 영판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앤틸로프 캐년이 있는 페이지(Page)를 향해 갑니다. 앤틸로프 캐년은 나바호족의 영토에 있어 일반 개인이 홀로 구경할 수는 없고 나바호족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서 구경해야 합니다. 가끔씩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순식간에 불어난 강물에 의해 사암이 깎여 만들어진 사람 한두명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계곡으로 위쪽으로는 굉장히 좁은 틈이 나 있어 햇빛이 들어오면 사암의 물결무늬가 다양한 황금빛으로 보여 사진가들에게 유명한 곳입니다.

카 옌타와 페이지는 같은 아리조나주에 위치하지만 카옌타는 유타주와 같은 시간대를 사용하고 페이지는 아리조나주의 시간을 사용하므로 9시가 한참 넘어서 출발해서 2시간 반정도 달렸지만 11시 쯤 페이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계곡 바닥까지 빛이 내려온다는 11시 반에 출발하는 투어에 참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여행사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1시반 투어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근처의 대형 마트에서 약품, 고양이 장난감 등을 쇼핑하고 점심을 대충 먹고 나니 어느덧 투어 시작 시간이 되어갑니다. 여행사의 개조한 4륜 구동 트럭의 짐칸에 앉아 10분여를 달려가니 계곡의 입구가 나옵니다. 해가 가장 높이 뜨는 정오쯤에는 계곡 바닥까지 햇빛이 비치지만 이미 해는 가장 높은 곳을 지나 계곡 위쪽에만 황금빛 빛을 보여줍니다. 가이드는 계곡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다음 이곳 저곳 사진찍기 좋은 포인트들을 안내해 줍니다. 다른 가이드들을 따라온 사람들로 이미 붐비는 그리 길지 않은 계곡을 지나 반대편으로 나온 다음 다시 사진을 찍으며 입구로 돌아오는데 같은 트럭을 타고 출발한, 캐논 카메라를 든 덩치가 좋고 머리를 기른 동양인이 "사진찍어 드릴께요."라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으로 차를 렌트해서 일주일간 혼자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드물게 만나는 동양인 대부분이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다 보니 한국인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짧고 즐거운 대화 이후 주차장에서 헤어지고 우리는 오늘의 숙소인 그랜드 캐년을 향해 갑니다.

앤틸로프 캐년의 입구


내셔널 지오그래피에 나온 포인트라는 곳에서 찍은 사진인데 빛이 아쉽다.


그나마 빛이 조금 남아 있는 곳



오후 햇빛을 받으며 거대한 붉은 암석 고원 옆으로 난 길을 한참 달리니 그랜드 캐년의 동쪽 출입구로 갈라지는 길이 나옵니다. 그랜드캐년은 남쪽과 동쪽 2곳의 출입구가 있는데 대다수가 이용하는 남쪽 출입구는 그랜드캐년 관광의 중심부인 빌리지로 연결되고 이곳에서 동쪽, 서쪽으로 길이 나뉘게 됩니다. 서쪽 길은 허밋 레스트라는 곳에서 막힌길로 끝나지만 동쪽길은 계속 이어져서 동쪽 출입구와 연결됩니다. 나바호족의 황량한 사막이 끝나고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 그랜드 캐년의 동쪽 출입구가 있습니다. 출입구 근처에는 그랜드 캐년의 동쪽 가장자리와 나바호족의 사막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데저트 뷰 포인트가 있고 아나사지 원주민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돌로 만든 관람탑이 있습니다. 처음 바라본 그랜드 캐년은 생각보다 큰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여러 형태의 암석과 계곡을 많이 보고 도착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눈앞에 너무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어 크기 감각이 마비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해가 거의 넘어가는 시점이라 다음 포인트를 보기위해 관람탑은 대충 분위기만 보고 나왔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데저트 뷰 타워 너머는 나바호족의 땅


해질무렵의 그랜드 캐년



두세곳의 포인트를 서둘러 둘러 보고 다시 한참을 달려가니 마침내 빌리지가 나옵니다. 예전에 깔린 철도역을 중심으로 숙박시설과 관광안내소가 있는 곳인데 깜깜한 밤인데다 가로등도 없는 일방 통행길이 있어 숙소를 찾기 위해 조금 헤매고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체크인을 마치고 숙소에서 페이지의 마트에서 산 미국산 신라면을 아이에게 먹이고 나니 거의 9시가 다 되어 갑니다. 호텔의 식사는 부담스러워서 셔틀버스를 타고 빌리지의 가게에 갔더니 불은 켜져 있지만 벌써 문을 닫은 상태입니다. 9시 20분쯤 아마도 마지막 셔틀 버스를 겨우 타고 숙소로 돌아와 과일과 이런 저런 것들로 대충 허기를 떼웁니다. 숙소주변을 잠시 구경해 보려고 나오는데 호텔의 바로 앞마당에 몇마리의 사슴 가족과 뮬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바로 숙소에서 희미한 달빛아래 조용히 풀을 뜯으며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커다란 야생동물을 보고 있으니 굉장히 비현실적인 느낌입니다. 뮬들은 사람들이 부리는 것인지 가까이 다가가도 전혀 개의치 않고 먹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사슴 가족은 서너발자국 근처까지 다가가니 슬며시 피해 다른쪽에서 계속 풀을 뜯습니다. 이런 아름답고도 비현실적인 느낌은 다음날 아침 그들이 싸놓은 변을 보고 좀 깨어졌습니다만...

5일째 이동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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